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북 사건 (문단 편집) === 호은부와 백유환의 암살 === 일본이 화북분리공작을 한창 책동하던 시기, 톈진에는 호은부와 백유환이란 친일 언론인이 있었다. 우선 호은부는 절강성 사람으로 1934년 12월 톈진에서 <국권보>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호은부는 국권보 창간과 더불어 스스로를 국권당 총재로 칭하고 [[만주국]]으로 건너가 화북자치운동을 선전하고 다녔으며 1935년 4월 29일, 돌아와 이름을 신죽군으로 바꾸고 북양호텔에서 투숙하며 계속 언론활동을 하고 있었다. 백유환은 호북성 사람으로 원래 혁명가였으나 [[국민혁명]] 이후 반장파에 가담하였다. 이후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친일 성향이 되었고 1931년 톈진으로 귀국하여 일본 조계지에서 <운보>를 창간하였다. 국민정부가 운보를 폐간시키자 백유환은 신문 이름을 <진보>로 고치고 스스로 사장에 취임하여 친일 언론활동을 하였다. 어느 시점부터인진 정확하지 않으나 만주국 중앙통신사 기자 직위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 모두 일본군의 수당을 받고 일본군의 비위에 맞는 선전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5년 5월 2일 오후 23시, 북양 호텔에서 괴한이 침입하여 호은부에게 총탄을 발사했다. 호은부는 4발의 총알을 맞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손쓸수 없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은 상태라서 다음날 사망했다. 다섯시간 후인 5월 3일 새벽 4시, 일본 조계지 의덕리 22호에 있는 백유환의 자택에도 괴한이 침입하여 취침 중이던 백유환에게 세발의 총탄을 명중시켰다. 백유환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시신 검시 과정에서 그의 상의 주머니에서 [[미나미 지로]] 관동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으며 일본 여권과 일본 명함이 증거물로 수집되는 등 이들이 일본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한편 톈진 총영사 [[가와고에 시게루]]는 5월 5일 107호 전문을 보내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암살된 것으로, 이번 범행에 뭔가 정치적 사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상상할 수 있다."라고 외무성에 보고했으며 5월 31일, [[히로타 고키]] 외상에게 "범죄 지휘자는 상하이 보안처장 겸 [[남의사]] 중앙 총부 집행부장 양호이다. 양호는 4월 25일, 상하이에서 베이핑으로 와 베이핑의 중앙 헌병 제3단 단장, 남의사 화북구 총부 집행부장 [[장샤오셴]] 및 기타 사람들과 여러 연락 교섭을 진행한 후 5월 3일 다시 남하하였다. 이 일은 대체로 확실한 것이었다. 이 사이 양은 자신과 장의 부하 여러 명을 천진으로 오게 하여 범죄 혐의자와 더불어 고의로 서로 때리는 척 하도록 하였다(듣건데 양과 장 본인도 일찍이 톈진으로 왔다고 한다). 범죄 하수인과 협조자는 이미 대체로 목표가 있었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 이 사건의 배후를 남의사로 지목했다. 이에 국민정부는 전국 중등 이상 학교장 및 학생대표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의한 자작극임을 주장하였다. ||당시 우리 중국과 일본은 아무런 분쟁도 없었으나, 일본은 일본 조계 내의 신문사에서 백과 호가 '남의사'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여 이를 구실로 삼았다. '남의사'는 애초 일본인이 날조한 것으로 우리는 이에 대해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 조계에서 발생하였다. 중국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조계, 그 조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 정부와는 관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하매 협정|후일 중앙군 철수, 당부 철폐라는 사태로 몰고 갔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이 대륙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계획해낸 음모였던 것이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국민정부는 지나주둔군 참모장 사카이 대좌를 배후로 지목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